Invisible Yaku


불완전한 육체로 수집한 권력의 이미지

이민훈

거리두기의 시대, 고립과 단절 속 개인이 스스로 인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면서, 우리는 동시 에 제약의 테두리 안에서 공감과 소통을 간헐적으로 갈망한다. 교육은 화상 프로그램을 통한 비대면 수업을, 일상은 뻔하게도 소셜네트워크라는 틀로 ‘거리두기’와 ‘소통하기’의 경계를 드나든다. 그 안에서 소통의 매체는 결국 이미지일 것이라 나는 생 각하는데, 현실의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 이 정제된, 제한된 이미지들을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거나, 세계의 전부라고 인식 하기도 한다. 어떤 사진/이미지를 생산해낼 수 있는지, 어떤 이미지의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지가 계급이 되는, 점점 이미지가 ‘정체화'되어가며 ‘권력화'되어가는 지금, 그것의 바깥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가시화된 힘은 다시금 이미지의 ‘계급적 구조'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시각의 작동 방식과 이미지가 계급적 구조를 만들고 권력화되는 현상들은 단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 1926~1984)의 파놉티콘(Panopticon),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 1966~)의 수직 원근법 논의 등을 통해 시각의 메커니즘이 권력구조와 근대 시각의 패러다임을 형성/붕괴하는데 기여한 담론은 구태의연하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사 회, 문화적으로 관습/체화된 시각의 위계는 동시대 -포스트 미디어 환경에서 넘쳐나는 이미지를 소비 이상의 것으로 대하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들에게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한다. 여기에 이미지를 마주하는 개인의 경험, 신체적/ 정신적 외상, 콤플렉스와 결합될 때, 그 권력관계는 더욱더 복잡하게 직조되어 견고해진다. 다시 말해 이 시각적 권력 구조에 개인의 '불완전한 육체’가 마주했을 때, 이미지는 기존의 것과 다른 형식을 만든다.

회화작가이며 동시에 타투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오시영이 이미지와 맺게 되는 권력관계는 좀 더 사적이며 개인적인데, 그 것은 ‘색약’을 갖고 있는 신체, 즉 ‘불완전한 육체’로의 조건일 것이다. 작가는 색을 인지하는 능력이 보편적 기준에 비해 떨어 진다는, 인지할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수반한 상태로 이미지를 대하고 있는데, 단지 색을 감각하는 민감도가 떨 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구분하지 못하는 색감의 형상, 텍스트, 맥락, 사회적 합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보편적 세상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색에 대한 감각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회화 작가로 그리고 타투이스트로 활동하는 그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결핍일지는 가늠하는 것조차 힘들다. 또한 사고와 수차례의 수술로 생긴 다리의 ‘흉터’는 작가가 갖고 있는 육체적 결핍을 더 견고히 자각하게 한다. 이렇게 불완전한 육체로 이미지를 대 하는 오시영은 그 권력관계를 해체하거나 저항하거나 피해 돌아가기보다는 그것(곳)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경유해 다른 목적 지 《Invisible Yaku: 보이지 않는 야쿠》로 도달하게 된다.

오시영에게 기존의 권력구조를 경유하여 새로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자신의 결핍을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조건 속에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는 몇 차례의 전시를 통해 과거 기억을 특유의 모호한 색감과 표현으로 구성해내는 작업들을 선보여왔는데, 여기서 그의 기억은 가까운 시공간의 기억이 아닌, 비교적 ‘오래된’, ‘왜곡된’, ‘불분명한’ 기억을 채 택하게 된다. 작가에 따르면 “오래된 기억은 상상 속의 이미지들이 뒤섞여 있고 왜곡이 심해 프레임이 불분명하기에 매력적” 이라고 설명한다. ‘오래된 기억을 수집하여 기록하는 방식’은 오시영의 작업에 중요한 방법론으로 남게 된다. 구체적 형상을 인지하거나 재현해내는 데 제동이 걸리는 육체적 조건의 그가, 선명하지 않으며 보편적 형상과 색감으로 합의가 불가능한 ‘오 래된 기억’에 매료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Brown Belt>(2017), <Duck Down>(2017), <Woman and Royal Tombs>(2017)등의 기존작에서는 기억을 통해 구성된 화면 안에 인물을 재현하고 있는데, 인물의 색감은 낮은 채도로 푸른 회색빛을 띄며 그 위에 어딘지 어색하게, 억지로 살구빛 물감(WINSOR&NEWTON 사의 Flesh Tint Oil Color) 이 얹어져 있다. 그러면서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색감, 배경, 기억의 공간들에는 인물에 쓰였던 살색들이 덕지 덕지 발려있는 데, 이는 오시영의 조건인 색약에서 기인하고 있다. ‘보편적 색감의 살색’을 구분할 수 없는 그의 눈은 인체를 회색빛으로 표 현하게 되는데, 배경의 어두운 갈색톤과 살색을 민감하게 구분할 수 없는, 구분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편 적 살색을 사용하는 방법은 WINSOR&NEWTON 사의 Flesh Tint Oil Color 물감을 사용하는 ‘(기계적) 규칙’이 있을 뿐이 다. 특유의 어두운, 모호한 색감들이 기억을 통해 재현된 이미지들에 뒤섞여 상황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완전히 덮어버려 구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표현 방법들은 오시영의 오래된 기억과 불완전한 육체적 표현이 결합되어 불분명하며 왜곡 된 형상과 분위기가 조작된 기억을 효과적으로 소환해낸다.

오시영의 2019년 작들에서 오래된 기억을 수집하여 기록하는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한데,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눈에 띄는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이미지의 권력구조를 경유하는 두 번째 방법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불완전 육체를 위의 작업들에서는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그 안에서 해결방법을 찾았다면, 이번의 경우에는 그 불완전한 육체를 적극적인 작 업의 태도로 내세우며, 그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욕구’를 가시화하여 권력의 이미지를 자신이 직접 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Lolipop>(2019), <Study 1 - Realm of the Naughties>(2019), <Playing House>(2018), <Circles>(2019), <Invisible Yaku>(2019), <Landscape in Mythology>(2019) 등의 작업들에서 눈에 띄는 특징들은 그가 타투이스트로 일할 때 자주 사용하는 이레즈미(入れ墨) 양식의 도상들을 차용한다는 점이다. 오시영이 이토록 일본 우키요에 이미지의 영향 을 받은 이레즈미 도상에 매료되어 있는 이유는 이레즈미가 갖는 시각적 권력일 것이다. 일본 야쿠자들의 힘을 상징하는 문신 을 새긴다는 것은 말 그대로 ‘권력의 이미지를 입는다는 것’이다. 오래된 기억과 이레즈미 타투의 전통적, 종교적 도상들이 혼 재된 낯선 이미지에서 특히 인상 깊은 것은 붉은 다홍색과 선명한 청색 계열이 대조적으로 구성되어 가쿠보리(額彫り: 이레즈 미 타투에서 배경을 채우는 파도, 구름 등의 장식문양)로 화면 속 공간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선명하고 높은 채도의 대조는 오시영이 가시화할 수 있는, 즉 보편적 시각으로 인지 가능한 색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불완전한 육체를 통해 수집된 오래된 기억들과 이레즈미의 도상들은 일상적 개인의 기억, 인물들이 선명한 물감의 색채 공간 안에서 신화적 장면들을 재현해냄으 로써 시각적 권력구조의 전복을 시도한다.

작가는 스스로 타투 하는 행위를 과거 외상으로 인한 육체의 결핍을 채워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아래의 작업들에 서는 그러한 충족의 욕구를 더욱더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Baptism>(2019), <Picnic>(2019), <Fishing>(2019), <Bath>(2019), <San Antonio>(2019), <Wave Study3>(2019) 작업들에서는 화면의 물리적 구조의 형식적 변화가 나 타난다. 캔버스 틀에 적합한 규격의 천이 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재단한 천이 올라가 있고 미처 천이 덮지 못한 노출 된 캔버스 틀은 ‘찢겨진 살가죽 사이로 드러난 뼈’처럼 보여지며, 불완전한 육체는 본격적으로 이미지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 작한다. 오시영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본인 다리의 흉터가 ‘덩어리’처럼 인식된다고 언급했는데, 살면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들이 과거의 경험들이라면 그렇게 구성된 자신의 정체성이 ‘기억의 덩어리’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 기억의 덩어리는 흉터(물 리적 외상에 대한 오래된 기억)이며, 흉터는 다시 기억의 덩어리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즉 기억의 덩어리인 불완전한 육체는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문신을 새기는 과정은 몸에 흉터를 내어 이미지를 얻는 것인데, 결국 흉터를 가리기 위해 새기 기 시작한 문신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 흉터를 새기는 아이러니가 되고, 흉터의 덩어리를 늘려감에 따라 정체성의 몸집을 부풀 려가게 된다. 이러한 욕구의 메커니즘은 그의 작업에서 타인의 피와 살을 수집하는 형식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이레즈미 의 신화적 도상들과 장식들이 혼재된 기억들에 수집된 타인의 육체의 파편이 묻은 타투 바늘을 균일된 조형성으로 가져오면 서 그 불완전한 이미지는 스스로 주체적 내러티브를 갖게 된다. 자신의 불완전한 육체에 대한 결핍을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결핍을 이제는 본인이 주체로 화면 안에 채집하고 나열하고 전시함으로 어쩌면 조금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기득권화되 어버리려고 한다.

오시영의 이번 개인전 《Invisible Yaku: 보이지 않는 야쿠》에서 낯선 색채의 조합과 이상한 도상들이 어우러진 이상한 형식 의 회화들을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모두가 외상을 갖고 있는 지금, 불완전한 육체의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코발트블루가 너 에게도 동일한 색으로 감각되고 있을까?”, 우리가 보는 색/형상은 결국 보편적 기준으로 공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일 것 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끊임없이 사용자의 관심 이미지로 세상을 좁혀나가고 있는, 단절과 고립으로 내몰리게 되는 동시대 환경 속에서 고립되지 않으며 권력화되지 않는 이미지를 획득/공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